세계 5대 브랜드인 에르메스의 명품이불이 통영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에르메스의 이불을 만들고 있는 장인은 용남면에 있는 조성연 누비장(62). 재불(在佛) 설치미술가인 이슬기 작가의 디자인을 구현해 내, 통영누비를 세계 명품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것이다. 캐시미어로 ‘변방 늙은이의 말’ 등 세가자제 작품을 12점씩 한정 제작해 2017 밀라노 가구박람회에 전시한 것이 에르메스 상표를 붙이게 된 시작이었다. 36개 한정품으로 제작된 이 제품은 각각 1500만원씩에 팔렸다.“원래 누비는 천을 누비는 사람,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 구분되
1961년 9월에 유럽으로 건너온 아내와 프라이부르크에 거주했던 선생은 1963년에 쾰른으로 주거를 옮겼고, 그해 북한을 방문했다.몇 년 후 선생의 인생에 가장 큰 상처를 준 동베를린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결정적 요소가 된 북한 방문은, 죽마고우이자 젊은 시절 일본 유학을 함께 했던 통영 출신 작곡가 최상한이라는 이름 때문이었다.부인과 자녀는 모두 한국에 두고 한국전쟁 때 월북한 최상한의 소식이 궁금했던 선생은, 다름슈타트 하기강습회에서 만난 동베를린 출신 여학생에게 북한대사관에 친구의 소식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고, 북한대사관을 통
1958년 9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의 주최자인 슈타네이커로부터 1959년 다름슈타트 하기강습회에서 연주될 곡 위촉을 위촉받은 선생은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작곡했다. 12음 기법을 사용하면서 동양적인 정적과 순음악적인 요소를 첨가한 작품이었는데, 악보를 본 지도교수 보리스 블라허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선생을 최초로 국제무대에 데뷔시킨 이 곡은 1959년 9월 4일 저녁 8시 30분, 미국 출신의 젊은 지휘자 프랜씨스 트래비스 지휘로 연주되었고, 프랑크푸르트 방송국 통해 전유럽에 중계 방송되었다.연주가 끝난 후 청중들의 반응
서울 강남 3구 중 하나인 서초구 방배동에 작은 통영이 있다. 박병기(67)·이복자(66) 부부가 운영하는 ‘통영 바다풍경’ 식당이다. 이곳에서는 도다리쑥국, 물메기탕, 멍게비빔밥 같은 통영 계절음식과 나물비빔밥, 멸치쌈밥, 충무김밥, 방아전 같은 통영향 가득한 음식을 판다. 동네맛집으로도 소문나, 올해 3월엔 KBS TV ‘김영철의 동네한바퀴’ 161회차에 방송되기도 했다. 방송에는 매일 새벽 통영에서 직송되어 올라오는 싱싱한 해산물로 정통 통영식 밥상을 차리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통영뿐 아니라 경남의 많은 출향인들이 고향의
“통영 출신, 특히 동피랑 출신의 공연기획자 김호진입니다”이렇게 스스로를 소개하면 이 사람 대체 누군가 싶겠지만, 김호진씨는 만만찮은 내공과 경력의 ‘전국구급’ 공연기획자다.김호진씨의 ‘튜나레이블’은 올해로 어느덧 10년을 공연계에서 버텨왔고 50회가 넘는 공연을 만들었다. 튜나레이블이 만든 공연을 본 음악팬들은 모두들 “평범하고 지루한 기획이 없다. 독특하고 개성있고 일단 재미가 보장된다”고 입을 모은다.통영출신으로 서울에서 IT관련 직장을 다니던 김호진씨는 2010년 KT&G ‘상상마당’ 기획자 교육 참가를 계기로 공연기획자의
약 1년간의 고생스러운 파리 생활을 마치고 1957년 7월 선생은 서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보리스 블라허라는 저명한 작곡가의 지도를 받고 싶었고, 생활비와 등록금 등도 고려한 처사였다.서베를린 음악대학에 적을 둔 선생은 스스로 나이를 20세 줄이고 20대 청년이 되어 젊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생활하며, 보리스 블라허, 슈바르츠 실링, 요제프 루퍼 등 현대음악의 전선에서 강한 이력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지식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나갔다.베를린 유학 시절 선생의 가장 큰 체험 중 하나는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였다. 1958년
- (지역응급의료센터) 24시간 응급의학과 전문의 상주- (심뇌혈관센터) 뇌졸중 환자 도착 즉시 진단 시스템 구축- (분만센터 및 산후조리원) 24시간 분만시스템 가동 및 공공산후조리원- (호스피스 완화 의료센터) 말기암 환자 및 가족의 고통 경감- (소아병동 별도 개설 운영)통영적십자병원이 2019년 11월 정부로부터 통영.고성.거제지역 거점 공공병원으로 이전 신축이 결정됐지만, 부지를 제공할 통영시가 차일피일 미루면서 차질을 빚고 있다.보건복지부는 수도권과 대도시에 살지 않더라도 응급, 중증질환과 같은 필수의료는
지난 주말(4.29~5.1) 죽림 내죽도 공원, 코로나 상황이 풀리는 시기에 맞물려 오랜만에 통영에 야외공연이 열렸다. 그것도 한두시간 일회성이 아니라 사흘 연속이다.프로 재즈 밴드와 지역 청소년 동아리, 직장인 밴드의 무대가 다채롭게 열렸으며 그림전시까지 마련된 2022 통영국제트리엔날레 지역연계프로그램 ‘재즈 인 통영’이다.공연을 보며 즐거워하며 박수치는 남녀노소 시민들 뒤로 안도의 한숨과 함께 푸근한 미소를 짓는 사람, ‘재즈 인 통영’의 주관 단체 ‘다락방’의 대표이자 기획자 김효동씨다.그는 “무엇보다도 주말 나들이 나오신
“나는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극복할 것이며 나에게 주어진 이 3년의 배움을 통해 결단코 내가 자랄 때 황무지 같은 우리나라의 음악계에서 하던 그 고생을 나의 후배들에게는 시키지 않으리라고 조국의 하늘을 두고 맹세하였소.”선생의 유학 목적은 세계적인 작곡가가 되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의 본토에서 치열하게 공부하고 돌아와, 이 땅의 황량한 음악의 대지를 풍성하게 가꿀 밑거름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도쿄, 홍콩, 이스탄불을 경유해 2주일 걸려 1956년 6월에 도착한 프랑스 파리. 국립음악원에 적을 두고 보낸 1년의 수학 기간은
“피아노 3중주”와 “현악 4중주”로 1955년 제5회 서울특별시 문화상 음악 부문에 선정된 선생은 1956년 4월 11일 서울시 공관 수상식장에서 상장과 부상으로 상금 10만 원을 받았다.10만 원! 당시로는 매우 큰 금액의 돈을 받아든 선생은 꿈에 그리던 유럽 유학과 가장으로서의 책무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었는데, 부인이 명쾌하게 선생의 진로를 결정해 주었다. “나는 아이들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친정집 근처에 살겠어요. 어느 학교에서건 교사 노릇을 하며 내 생활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당신 소원대로 하세요.”서울시 문화상 상금
제42회 장애인의날 행사장, 연단에 서서 인사말씀과 축사를 하는 기관단체장 옆에는 리드미컬하게 손을 놀리며 표정과 몸짓을 더해 ‘수어’로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이 있다. 통영시수어통역센터 소속 수어통역사 설정희 대리다.행사장 대형 화면으로도 설정희씨의 수어 통역 장면이 송출되고 있는데 장내에서 유일하게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이 수어통역사다. 수어통역은 ‘수화’에 대한 통념과는 달리 손과 팔의 동작과 함께 얼굴 표정까지 동원해야만 최대한의 내용 전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장애인의 날 뿐 아니라 각종 행사장과 각종 공공기관에서도 농아인과
“생각해 보면 참 감사한 일이지요. 하고 싶어 시작한 정치는 아니었지만, 16년 동안 상임위원장 한 번, 부의장 두 번, 의장 두 번을 지내면서 정치인으로서 보람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다 내려놓고, 시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 조용한 삶을 살고 싶습니다.”4선 의원인 강혜원 전 통영시의장(65)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주변에서 밀어주겠다는 지지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막상 결정하고 나니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새삼 진리라고 느낀다.강혜원 의원은 군대 3년을 제외하면 통영을 떠나본 적이 없다. 아내도 용남면 사람을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선생은 식솔들을 이끌고 서울 성북동에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부인의 오빠가 결혼 선물로 사준 피아노를 팔고 빚을 얻어 산 한옥 한 채.선생의 집 길 건너에 당대의 석학이자 시인, 고려대 교수 조지훈이 살고 있었다. 선생과 조지훈은 보자마자 심우(心友)가 되었다. 호주가(好酒家)였던 조지훈과 벗들은 통금 시간인 자정 직전에 선생의 한옥으로 들이닥치곤 했는데, 부인이 끓여주는 콩나물국과 탁주를 마시면서 인생과 예술을 논했다. 이 시절에 태어난 것이 조지훈 작사 윤이상 작곡, 고려대학교 교가이다.1953년
산양 꿈이랑도서관 앞마을 다정한 집에 ‘다행복연구소’가 있다. ‘다多 행복한 마을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전미자 대표(57)는 이 작은 집에서 다문화 어린이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하고 요리를 만들며, 결혼 이주민들과 한글 공부를 한다.집은 처음 지을 때부터 이웃들과 함께 푸드교실이나 한글교실을 하기 위해 열린 구조로 지었다. 문을 열자마자 만나는 곳은 개방된 주방과 거실이다. 묵직한 분위기의 통나무 책상은 함께 공부를 하는 곳이면서, 삶을 나누는 공감의 공간이 되기도 하고, 다문화에 대한 집필 공간이 되기도 한다.“진주에서 발행
신혼집은 신랑이 자취하고 있었던 학교 사택이었다. 적산가옥이었는데, 오래 불을 때지 않은 얼음 방에 군불을 넣으면서 신혼이 시작되었다. 부엌일은 초보였고 신랑의 월급으로는 2주 생활비도 되지 않았지만, 신부는 신랑의 건강을 위해 뱀장어를 장복하게 했고 자다가도 일어나 체온을 점검했다. 신혼 다음 달에 태기가 있었는데, 사과 한 개도 사 먹기 어려운 형편이었다.가난 중에서도 환했던 신혼 시절이 얼마 가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학교가 휴교하는 바람에 신랑의 월급이 끊어져, 신부는 결혼반지를 팔았고 신랑은 일제 강점기 때 도피 생
선생이 아내가 될 여인을 만난 것은 부산사범학교 교사 시절이었다. 폐결핵으로 인해 각혈하고 사경을 헤매다가 학교에 복직한 선생은 고려심포니의 부산 공연 때 처음으로 같은 학교 국어교사로 부임한 이수자를 조우했다.마음에 때가 없고 순수한 바탕에 정서와 품위를 갖춘 자신의 건강한 반려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 선생은 병든 몸과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어릴 적부터 품어온 세계적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이 거의 허물어진 상태였다.가슴이 소월의 시를 읊게 하는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발화되어 집안도 동료들도 모르게 전개된 사랑은 선생의
“통영은 너무나 많은 진주를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진주인지 몰라요. 왜? 일상이니까요. 흔히 알고 있고, 늘 보던 거라 진주를 돌멩이인 줄 알아요. 하지만 저처럼 밖에서 들어온 사람들은 진주를 보고 놀라는 거죠.”용남면에서 요트펜션을 운영하고 있는 심현철 씨(57)는 올해로 통영살이 12년에 접어들었다. 앞만 보며 달리던 삶에 지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은둔지로 찾아들어온 곳이 바로 통영이었다. 통영은 그에게 쉼을 주었고, 다시 일어날 힘을 주었다. 새로 눈뜨고 보니 통영만큼 곳곳에 진주를 품고 있는 곳이 또 있으
“통영에서 부르면 너무 기쁜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옵니다.”오가는 시간 10시간, 컨디션 조절까지 하려면 쉽지 않은 거리이지만 바이올리니스트 전진주는 통영을 오가는 길이 너무 즐겁다고 말한다. 몇 달에 한 번, 연주를 위해 오가는 길이 마치 고향에 오는 듯한 설렘을 준다는 것이다.그는 2020년 코로나로 인해 국제음악제가 취소되었을 때 처음 통영에 왔다. ‘카메라타’라는 포럼 행사의 대체 프로그램으로 윤이상 기념관에서 독주회가 열렸는데, 그 연주를 하기 위해 온 것이다. 통영은 오가는 길이 너무 멀어 엄두를 못 내던 곳이었다.“윤이
“첼로를 귀신같이 다루는 팔름의 부탁을 받고 작곡하게 되었는데, 첼로는 나 자신이다. …협주곡은 모든 생명은 순수하게 태어난다는 것을 표현하며 시작된다. 그러나 곧 어두운 운명과 악에 둘러싸인다. 죽음에 직면하는 목탁소리가 집요하게 울린다. 첼로는 악과 싸우며 최후에는 어떻게 해서든 순수한 경지에 도달하려고 애쓴다. …이 협주곡에서 나는 나의 반생과 철학을 최종적 동경의 세계로 그렸다.”지그프리트 팔름이 1976년 초연한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 붙인 선생의 말대로 첼로는 선생의 분신이었다.일제 강점기 엄혹한 시절 일경의
굴 껍데기는 석회비료로도 쓰이고, 김 종패를 붙이는 데도 쓰이고, 가금류의 사료로도 사용된다. 고양이 배변 모래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렇게 쓰임새가 많은 굴 껍데기지만 재활용되는 것은 극히 일부분뿐, 통영의 해안은 ‘폐기물’이 되어버린 굴 껍데기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굴 껍데기가 내뿜는 지독한 악취가 통영 바다의 아름다움까지 잠식해 버린다.하지만 획기적인 방법으로 굴 껍데기를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업이 있다. 풍화리 바닷가에 자리잡은 가화바이오다. 삼십대의 미모를 가진 김경옥 대표(46)가 통영에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