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잉태한 언어는겨울의 설레이는 가지 끝에설레이며 있는 게 아닐까**김춘수, ‘나목의 시’ 중에서
저항할 수 없는 빛의 품속에서오래전에 말라 죽은 측백나무가머리를 흔들며 눈을 뜬다.
가지 끝에 붙어 마른 마음 서로 비비다가생 하나가 허공으로 떠나는순간의마찰음,박제된 매의 발톱 끝 같은.참을 수 없는존재의 가벼움이여!
당신 앞에 서니한낱 마른 뼈다귀일 뿐입니다.월광의 파편 무수히 반짝거리는 산정 호수를북두칠성 바가지로 퍼 마셔도 끌 수 없는무한 갈증일 뿐입니다.
은빛 새소리를 나르는 바람의 이마에춤추며 떨어지는시간의황금빛죽음.
만추의무한 벽공 아래나신(裸身)의단독자.
핏빛 심장에서 태어나는 시(詩)도 있다.잔가지 끝마다 눈꺼풀 없는 눈(眼)을 달고망망한 허공을 만지는외롭게 마른 줄기가 쓰는 시도 있다.
먼 옛날에는 심장이 뛰고 푸른 피가 흘렀던 육질(肉質)이서서히 굳어 목질(木質)이 된 것이다.시간의 숫돌에 날을 갈아온 이성의 낫이상상력의 가지들을 잘라버린 것이다.
후덕한 산의 품에무량수 하얀 별들의 은하.은목서 가을 꽃 향기만 리를 덮는다.
부럽다,나목의 시간.낡은 마음 벗고새 마음 기다린다.
어떤 나무가 있다,밤이 되면수관 속으로 피가 흘러 꿈틀거리다가첫 햇살을 맞고 다시 식물로 돌아오는.
가을 오후누군가 숲을 연주하고 있다,트레몰로 주법으로.
당신이 거느린 빛이어둠의 천장을 부수면마른 뼈들이 춤을 추며 일어나….
고사목의 목마름이구름을 향하여 발뒤꿈치를 들고 있다.몸속의 물 모두 울어버린 매미 껍질 하나가을 어귀에 떨어져 있다.
근육질의 뼈가 꽃을 피운다.염천 지옥에서백 일을 지나도 시들지 않는다.목백일홍.이중도 (시인) *통영 시민들의 팍팍한 일상이 잠시 쉬었다 가는 그늘이 되기를 바라며,이중도 시인이 직접 찍은 나무와 나무에 붙인 짧은 단상을‘나무 노트’라는 제목 하에 연재합니다.
1994년 가을에 예음문화재단이 기획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선생의 이름으로 열리는 음악회 일정에 맞추어, 선생도 조건이 허락되면 한국 방문을 희망했는데, 귀국을 위한 선생의 유일한 조건은 명예회복이었다.“대통령께서 저의 명예를 회복하여 주시면 저의 고국 방문은 성공할 것입니다. 꿈에도 잊지 않던 그 고향의 앞바다가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고향에 가서 선산의 묘 앞에 향을 피우고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1994년 6월 26일,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그러나 한국 정부는 선생의 명예회복에 대해여 소극적이
늦은 나이에 유럽으로 떠나 현대음악의 본토에서 공부하고 작곡가로 출발한 선생의 여정에는 많은 이정표들이 있다.1959년 다름슈타트에서의 환호, 1966년 도나우싱엔음악제에서 “예악”의 큰 성공, 1972년 뮌헨올림픽의 서막을 연 오페라 “심청전”, 1984년 베를린필하모니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초연된 “교향곡 1번”….이러한 이정표들을 거쳐 선생은 명실상부한 현대음악의 세계적 거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1985년 1월 15일, 튀빙겐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윤이상 씨는 독일에 와서 전위음악에 전념하면서, 또한 여기
“조국 분단 이후 43년, 오늘처럼 전 민족이 통일을 염원하고 그를 위하여 행동에 옮긴 때는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북의 정치적 협상을 앞당겨 우선 온 민족이 동질성을 되찾고 그동안 쌓였던 복잡다단한 감정과 갈등을 풀고 정치이념을 초월한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우선 대행사를 마련하여 전 민족에게 고갈증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마련하여 이 행사가 우리 강토에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 소개되어 우리 땅에서 세계평화에의 커다란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민족합동음악축전 실무 절차안 중에서)1987년 9월 5일,
1969년에서 1971년까지 하노버음악대학 강사,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서베를린음악대학 명예교수를 지내고, 창작에 대한 열정으로 인해 교수직에 매력을 잃어가던 선생을 은사 슈바르츠 쉴링이 베를린 음대의 위상을 위해 정교수로 추천했고, 1977년부터 1987년까지 베를린예술대학 정교수를 맡았다.독일, 영국, 그리스, 루마니아, 미국, 타이완, 일본 등에서 많은 제자들이 몰려왔고,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음악계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한국 제자로는 김정길, 강석희, 백병동이 있는데, 모두 서울대 음대에서 재직하며
1980년 5월 17일. 이국의 라디오에서 조국의 소식을 들은 선생은 그 자리에서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라디오와 티브이로 광주를 지켜본 선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처참한 살인 진압의 현장을 보고 통곡을 했다.그때 마침 서독방송국이 대관현악을 위촉해 왔고, 동족이 동족을 짓밟는 악마적 사건을 인류 역사에 남겨 모든 독재자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해 작곡한 곡이 “광주여 영원히!”이다.이 작품을 쓸 때 선생은 기존 자신의 스타일에서 과감히 벗어나, 온 세계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전시적인 표제음악으로 썼다. 평론의 관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