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국회 조사보고서.

통영 민간인 학살 사건을 말한다④

4·19 혁명이 일어난 1960년, 적군이 아닌 아군의 손에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사람들이 10년 한을 품고 일어나 유족회를 결성하고 억울한 죽음을 밝히겠다고 나섰다. 억울한 피해가 많았던 통영에서도 ‘민간인 학살 유족회’가 결성되어 가해자들을 고소하고 피해상황을 파악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통영 유족회의 중심은 교사를 지낸 탁복수 여사였다.

탁복수 씨는 본인이 직접 25일 동안 항남동 멸치창고에 갇혀 있었을 뿐 아니라, 눈앞에서 남편이 맞아 숨이 끊어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에 더 피끓는 증인이 되어 전국 유족회의 부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이때의 분위기를 5월 22일자 동아일보는 이렇게 적고 있다.

“비밀 속에 잠겨 있던 통영 양민학살사건의 진상이 11년 만에 밝혀져가고 있는 이곳 충무시는 21일부터 벌써 유족들의 흥분된 공기가 감돌고 있다.

통영수산고등학교 교감을 지내고 어장을 경영하다가 학살당한 안승관 씨의 미망인 탁복수(47) 여사가 주동이 된 학살 희생자 유가족들은 그 당시 희생된 가족들의 명단과 살인범들을 조사하고 있으며, 학살을 감행한 헌병 문관들이 아직도 충무시내에 거주하고 있어 지난 10년 동안 그들을 만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해오던 이들은 이제는 원수를 갚는다고 흥분하고 있다.

…가족들은 현재 시내에 거주하고 있는 당시 문관들과 방위대원들 중에 누가 그들의 가족을 죽였다는 확증까지 잡고 있다.”

국회에서는 ‘양민학살진상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11일간 조사활동을 벌였다. 통영에는 6월 1일 국회 진상조사단이 왔다.

전쟁 당시 읍장이었던 김채호 씨는 박태진 계엄사령관과 오덕선 헌병대장, 신범식 공병대장을 꼽으면서, 그들이 “공연히 통영에 재산량이나 있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뒷돈을 받고 풀어주었다.”고 증언했다. 동생 김철호 씨에 대해서도 “해방전후부터 공산당하고 적대시하고 싸워온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잡아갔다.”면서 오히려 앞잡이들이 “동생을 없애야 자기들이 살 것으로 판단해 잡아간 것 아닌가 의심스럽다.”고 했다.

탁복수 씨는 당시에 어린애를 업고 헌병에 잡혀들어간 일과 사령관실에서 직접 취조를 받으면서 “대학 나왔으니 빨갱이가 아니냐?” 하며 남편이 맞던 일을 증언했다. 맞다가 의식이 없어 쓰러지자 물을 끼얹고 하더니, 목숨이 끊어지자 새벽에 실어다 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증인으로 나선 조문갑 씨는 “우리 아버지가 물에 죽었는가 땅에 파묻혔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다.”는 기가 막힌 말을 했다.

이후 가해자 조사와 피해자 보상을 위한 특별법 제정 건의안까지 국회를 통과하고, 통영의 가해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그중 도산면의 이순경에게는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다시 뒤집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5‧16 쿠데타로 인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아니, 오히려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두 번째 학살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5‧16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는 전국의 유가족회 임원들에게 최고 사형의 판결을 내렸다. 통영의 탁복수 씨에게도 “좌익 처형자를 양민인 양 가장 선전하여 민심을 현혹시키고 유족 약100여 명을 규합하여 소위 충무시 유족회를 결성… 좌익분자를 애국자인 양 허위 선전하여 용공사상을 고취하였다.”며 징역 15년형을 언도했다. 억울함을 풀려다가 오히려 범죄자가 된 것이다. 사형 3명, 무기징역 2명, 징역 15년 3명, 10년 2명, 7년 1명인 무시무시한 판결이었다.

이후 재심 형식으로 열린 1961년 12월 7일 혁명재판소 심판부 제5부(재판장 김용국)는 대구유족회 이원식 회장을 사형에, 전국유족회 노현섭 회장과 권중락, 이삼근 경북유족회 총무를 징역 15년에, 문대현 경남유족회장을 징역 10년에 처하는 판결을 내렸다. 탁복수 씨를 비롯한 8명은 “유족회 가입 전은 선량한 국민이었던 점” 등이 참고가 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통영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때 유가족 대표들이 개같이 맞고 안 왔습니까?”

당시 일을 기억하는 노인들이 하는 말이다. 2심 판결이 나기까지 구금돼 있던 탁복수 씨가 6개월 만에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통영유족회는 향방을 잃었다. 이후 군사정권은 ‘연좌제’를 도입, 유가족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권리마저 빼앗았다. 민간인 희생자들은 모두 ‘빨갱이’가 되었으며, 그 가족들은 연좌제에 걸려 수시로 감찰을 받으며 취업과 경제활동에 제재를 받았다.

정연조 진주유족회장

유골도 수습하고 책도 낸 진주유족회

진주유족회(회장 정연조)는 희생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임시보관소에 안치하고, 위령공원 조성이 완료되면 그곳에 영구안치하여 학생들의 교육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지난해에는 유족들의 증언을 기록해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벌여, 희생자 본인 8천만원 등을 배상받기도 했다.

진주유족회 정연조 회장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이 규명된다고 하더라도,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유족회 결성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진주는 유족회와 시민단체가 나서 유골 수습을 하며 진실을 규명해 왔기 때문에 이런 성과를 이루었다.

이번 2기 진화위 때 통영은 단 1명이 진상규명 신청을 했지만, “내가 신청한 것을 절대로 알리지 말라.”며 위축된 반응을 보였다. 진상규명이 바로 배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통영의 상처는 깊다.

 

진주 민간인 희생자 유해 임시 안치소.
총상자국이 선명한 유골 수백기가 안치되어 있다.

 

빈 솥에 물을 끓여 연기를 피웠다 김용민 유족

우리 집은 읍장인 큰아버지 덕에 연좌제 피해를 덜 받은 택이라요. 그런데도 도저히 통영에서는 살 수 없었지요. 주위에서 다 빨갱이라카니까 위축되어 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먹을 게 없는 기라요. 해방후 토지개혁 때 토지는 다 없어져버렸지, 빨갱이 집이라캐서 왕래도 어렵지 해서 굶는 날이 많았어요. 어머니가 중학교 과정을 나와서 당시로서는 좀 배운 사람이라, 자존심이 있었는 기라요. 야채장사를 시작했지만 밥을 못하는 날이 많거든. 그래도 굴뚝에 연기가 안 올라오면 사람들이 ‘저집에 밥 안 하는가 보다’ 할까봐 빈 솥에 물만 얹어서 연기를 내곤 했지요. 교사를 하던 누님이 부산으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부산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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