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전무 북춤 보유자 한정자 씨

승전무 전승에 평생을 바쳐온 한정자 회장.

둥둥, 색동 한삼이 북을 치고는 허공을 난다. 큰 북을 중앙에 놓고 4명의 원무(주 무용수)가 동서남북의 네 방향을 의미하는 청·백·홍·흑색의 단삼을 입고 삼현육각 반주에 맞춰 춤을 춘다. 원무 주위에는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12명의 협무(보조 무용수)가 창사를 읊조리며 충무공의 공덕을 찬양한다. 다시 색동 한삼이 북을 치고는 원을 그리며 물러난다.

통영에 전승해 오는 승전무 북춤이다.

승전무는 스토리가 있는 춤이다. 북을 한 번 치면 집합, 두 번 치면 진격, 세 번 치면 후퇴라는 뜻이다. 춤꾼들이 흩어졌다 모여들면서 세 번 나아가고 세 번 물러서는 삼진삼퇴를 연출한다.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는 전쟁에 임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전투 후에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해 추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는 통제영 교방청을 통해 300년간 전수돼 오다가, 폐영된 다음에는 기생조합인 권번에서 명맥을 이었다 .

그러나 “달이 고이 높이 돋을 사 지화자~ 지화자~ 지화자~ 지화자~ 우리 충무장군 덕택이요” 하는 승전무 창사가 일제의 눈에 고울 리 없었다. 일제는 이 가사를 문제 삼아 모든 공연행위를 중단시켰다.

조선시대 여성전문인으로 교양과 학식을 가지고 예술을 이어온 예기들은 한낱 ‘기생’이 되어 버렸고, 승전무는 그들의 보따리 속에 깊이 싸여 잊혀졌다.

이런 승전무가 복원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다. 춤에 푹 빠져 살던 이십대의 한정자, 엄옥자 씨가 승전무를 추었던 정순남 할머니에게서 당시의 춤을 복원해 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승전무는 북춤과 칼춤이 두 축을 이루고 있는데, 한정자 씨는 북춤을, 엄옥자 씨는 칼춤을 전수받았다.

“처음에는 할매(정순남)가 춤을 안 갤쳐줄라 해(가르쳐주려고 해). 기생이었다는 걸 숨카고(숨기고) 싶어서.”

통영 교방청에서 승전무를 가르치던 김해근에게 춤을 배운 정순남은 당시 환갑이 다 된 노인이었다. 어느 집 소실이 됐지만, 살림은 따로 내어 혼자 살고 있었다.

“우리가 날마도(날마다) 가서 ‘할매, 춤 좀 갤차주이소(가르쳐주세요).’ 하고 사정 안 했나? 스무살 연상의 할배(정순남 씨 남편)도 ‘니가 기생으로 죽겄나? 나 죽으믄 우찌 살래? 니가 그 춤을 갤차주면 니는 예술 복원하는 선생 되는 기고, 인간문화재도 될 수 있다.’ 하매(하면서) 할매를 꼬완기지(구슬른 거지).”

간절한 설득 끝에 정순남 씨는 오랫동안 싸매 두었던 북채와 칼을 꺼냈다. 젊은 시절, 분신처럼 지니고 있던 춤 도구들이다. 그리고 온몸이 기억하고 있는 춤사위들을 풀어냈다.

북은 어떻게 생겼는지, 옷은 어떻게 생겼는지, 손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 동작의 의미는 무엇인지….

정순남 할머니가 복원해 내는 승전무는 아름답고 호방하면서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춤이었다. 어렸을 때 발레를 배우고, 크면서는 전통무용을 배우고, 스스로 안무를 짜고 작품을 만들어 온 한정자 씨는 승전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승전무 북춤은 네 명의 원무, 열두 명의 협무, 악사까지 한 팀이 있어야 공연이 된다. 

두 춤꾼과 전통예술을 복원하려는 통영 문화예술인의 노력으로 승전무는 1968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21호가 되었다. 그리고 정순남 할머니는 이갑조(장구) 주봉진(대금) 이치조(대금)와 함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 승전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돼 초대 인간문화재가 됐다. 승전무 복원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나이가 어려 예능보유자가 되지 못했던 한정자 씨는 1986년 준보유자가 됐고, 1996년에는 엄옥자 씨(칼춤)와 함께 2대 인간문화재가 됐다.

한정자 씨가 처음 춤을 추기 시작한 건 유치원 때다. 할아버지가 어장과 여관을 경영하는 살만한 집안이었다. 10남매의 맏딸로 태어나, 동생들이 졸졸이 있었기 때문에 한정자 씨의 양육 책임자는 할머니였다. 그런 할머니가 춤과 연극을 좋아하는 예술 애호가였던 것.

승전무는 씩씩한 가사를 곁들인 춤이다.

“우리가 여관을 하니까 임춘앵 국극단 같은 기(것이) 우리 여관에 들오는(들어오는) 기라. 그 사람들이 공연을 한다 하면 할무니가 나 손을 딱 잡고 봉래극장 젤 앞에 앉는 기라. 그라고 어데 기생이 와서 춤을 춘다 하면 날 데꼬 가는기라. 사실은 할무니가 춤을 배와는데(배웠는데), 나가 고만 춤을 보믄(내가 그만 춤을 보면) 한번에 다 외와고(외우고) 장단도 외와고 그라니까 자꾸만 델꼬(데리고) 다닌기라. 나 기억에 이층집에 가서 기생 춤도 보고 따라도 하고 한기(한 것이) 생각난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다니며 일찍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발레를 배우게 됐다. 일본서 발레를 배워온 엄마 친구가 서호동에 발레학원을 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울이나 부산에서 유명한 춤꾼들이 와서 한 달 동안 임시로 강습회를 여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랄 때는 열일 제치고 찾아가 춤을 추는기라. 유영초등학교 강당에서 동무들이랑 창부타령, 도라지 타령에 맞차가(맞춰서) 춤을 배왔지.”

한정자 보유자는 춤에 관한 눈썰미가 있었다. 동네에 하나밖에 없었던 텔레비전에서 리틀엔젤스 공연단이 나와서 부채춤을 추는 것을 보면, 그 동작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비디오도 책도 없던 시절, 오로지 눈썰미와 레코드 음악만으로 춤을 깨우쳐 나갔다.
 
“여고를 졸업할 때가 되니깐 서울대 다니던 오빠가 ‘앞으로는 대학을 안 나오면 춤을 춰도 몬해묵는다.’카믄서(라고 하면서) 대학을 가라카데. 근데 그 때는 ‘공부 그기 해가(그거 해서) 어데 쓸건데? 머할라꼬 대학 가서 영어 배우고 하기 싫은 공부할끼고?’ 싶데. 당장 토영(통영)에 춤 갤차줄(가르쳐줄) 사람이 없는데.”

승전무를 후대에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한정자 승전무보존협회장

마음이 바빴던 한정자 회장은 서울의 강습소에서 속성과정으로 무용을 배우고는 통영으로 돌아와 강습소를 차렸다.

“동호동 통새미 옆에 닭장이 비어 있는기라. 그기를 통새미로(통째로) 빌려가(빌려서), 강습소를 차렸제. 나가 춤 갤친다는 소문이 나니까 학교마도(학교마다) 날 부르는 기라. 처음에는 배타고 욕지 학교에 들어가 한 멧달 있음서(몇달 있으면서) 1, 2학년 한 팀, 3, 4학년 한 팀, 5, 6학년 한 팀, 또 요롷게조롷게 묶어 대여섯 팀 맹글어가, 마스게임을 갤쳤지. 소고 들면 소고춤, 부채 들면 부채춤, 고래고래 고함을 체 가매…. 오데든 불르면 달려가 춤을 갤쳤지.”

그렇게 시작한 무용 교사 생활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진주교대와 명지대학교 등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다.

한정자 회장은 평생 춤꾼으로 살면서 전국민속경연대회 문공부장관상, 한산대첩제전 공로상, 통영시장 공로상 등 자랑할 만한 상도 여럿 탔다. 미국, 중국, 일본, 스위스 등에 초청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올림픽 특별공연, 대통령 취임식 경축공연도 했다.
두 딸도 승전무 이수자이고, 외손녀도 승전무 전승자다.

“펭생, 좋아하는 춤추고 살았신께(살았으니까), 마냥 즐거운 인생이었제. 비가 와서 춤을 몬 추는(못 추는) 날엔 이불 둘러쓰고 발가락으로도 춤을 춰야 한긴께(했으니까). 인자는 승전무 전수자들을 잘 갤차서 후대에 물려줘야겠다, 그 생각뿐이제.”

꽃처럼 아름다운 승전무를 되살린 한정자 승전무 보존회장은 오늘도 꽃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춤으로 풀어낸다.  

꽃처럼 아름답고, 북처럼 웅장한 승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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